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다나 왕조 (문단 편집) === 하르샤 시대 === 하르샤 왕은 국력 성장에 집중하여 그가 이끄는 바르다나 왕조는 100,000명의 보병, 50,000기의 기병, 60,000 마리의 코끼리를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큰 나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. 하르샤 왕은 7세기 초반에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북부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. 여러 지역 정권이 공존하던 북부를 다시 통합한 것이다. 특히 옛 마가다 지역을 지배하며 [[굽타 제국]] 시대 이후 [[파탈리푸트라]]를 수도로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하던 [[후기 굽타 왕조]]를 봉신국으로 삼았다. 하르샤는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. 자신의 딸을 서부의 강자였던 구자라트의 지배자와 결혼시키고, 영토를 늘릴 때 보태 준 나라와는 끝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 갔다. [[당나라]]와도 사신을 교환했는데, [[당나라|당]]의 승려인 [[현장]]과 [[신라]]의 승려 혜초가 인도를 방문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. 하르샤 왕은 종교와 문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. 그는 [[시바]] 신을 믿었으며, [[힌두교]]에 밀려 힘을 잃어 가던 [[불교]]와 [[자이나교]] 등에도 관대했다. [[불교]]의 중심지였던 날란다 사원에서는 불교 승려와 브라만이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. [[불교]]가 [[힌두교]]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. 다만 [[힌두교]]의 영향이 커지면서 [[카스트]] 제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했는데, 이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. '자띠', 즉 직업 사이의 구별도 엄격해졌고, [[불가촉천민]]에 대한 차별은 한층 더 심해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. 차별이 어느 정도였냐면, 보통 마을 바깥의 제한된 곳에서 살았는데, 마을에 들어갈 때는 소리를 크게 질러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. 하르샤 왕은 왕국의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부지런하고 자상한 왕이었다. 국가 제정의 25%를 백성들을 위해 썼는데, 백성들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[* [[조선]]에서 소 도축을 금했던 것과 비슷하다. 다만 [[조선]]에서는 성리학의 영향이 크다.], 굶주리고 아픈 사람에게 음식과 약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. 하지만 하르샤 왕은 이전 [[마우리아 왕조]]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지 못했고, 느슨한 봉건적 종속관계에서 허술하게 북인도를 다스렸다. 이는 결국 하르샤 왕의 죽음과 동시에 바르다나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. 참고로 이 하르샤 왕이 다스리던 시대를 따로 '''하르샤 제국'''이라 부르기도 한다. 여담으로 하르샤 왕이 죽은 뒤 《[[신당서]]》와 《[[구당서]]》 등에 의하면 하르샤 왕이 죽자 아라나순[* 중국 사서에서 나온 이름이다. 대한교과서에서 출판한 《인도사》라는 책에는 디나바디 왕이라고 나와 있다.]이란 자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. 정황상 신하가 반란을 일으킨 경우이거나 봉건적 종속 관계에 있었던 속국의 군주가 독립, 혹은 수도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. 이 자가 재물을 확보하려고 당시 하르샤 왕을 만나러 온 [[당나라]] 사신 왕현책과 30명의 부하들을 습격, 공물을 강탈했는데, 하필 왕현책이 부하 장사인과 함께 탈출해버렸다. 왕현책은 [[토번]], 네팔 국경지대로 도주한 후 격문을 써서 토번군 1,200명과 네팔군 7,000명을 확보한 후 아라나순을 공격했다. 왕현책과 장사인은 이 군대로 아라나순의 군대를 대파했고, 아라나순은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혔다. 아라나순의 잔당들이 저항했지만 괴멸되었고, 그러자 소국들이 앞다투어 왕현책에게 공물을 바치며 아부했다고 한다. 왕현책은 인도의 각 소국들에게서 받은 공물들과 아라나순을 끌고 유유히 장안으로 돌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